다예 14년(618) 우문화기가 강두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양광은 반란자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양광이 죽은 후, 샤오황후와 궁궐 관리들은 침대 판자를 제거하고 작은 관을 만들었고, 이는 강두궁 유주당 아래에 비밀리에 묻혔습니다. 나중에 Chen Leng은 모든 사람들을 모아 Yang Guang을 애도하고 의식 경비원을 준비하고 그를 Wu Gong의 단 아래에 묻었습니다.
양광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낙양에 전해졌다. 낙양의 관리들은 양광의 손자인 악왕 도우건덕을 사후에 양광민제로 추대했다. 이연은 꼭두각시 양유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당나라를 세웠으며 사후에 양광제(楊帝皇帝)로 임명되었다. 곧 낙양(洛陽)의 유력 관리인 왕세충(王十宗)이 양통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수나라는 공식적으로 무너졌다.
당나라가 강남을 평정한 후, 정관 5년(631)에 양광은 제사를 지내며 레이탕에 묻혔다.
추가 정보
양광은 매년 양주를 3번, 사이베이를 2번, 허유를 1번, 줘준을 3번 방문하며 장안을 자주 오갔다. 그리고 낙양. 나는 여행할 때마다 궁전을 짓는다. 인수 4년(604) 11월, 낙양을 지키기 위해 긴 해자를 파기 위해 지금의 산시(山西)와 하남성(河南) 지역에 수십만 명의 농민을 동원하고, 이듬해 동수도 낙양(洛陽)을 건설했다. 매달 최대 20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다예 원년(604년)부터 다예 6년(610년)까지 여러 구간의 운하가 개발되어 하남, 회북, 회남, 하북, 강남현(江南縣)을 동원하여 다예왕 3년과 4년에 율림(지금의 내몽골 덕두 남서쪽) 동쪽에 만리장성을 두 차례에 걸쳐 동원하였고, 그 중 절반 이상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1천만 명이 넘는 농민이 몰수로 혼란을 겪었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해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비극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대예 7년(611년) 왕보는 백성들을 이끌고 장백산(지금의 산둥 성 장구 북동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나라 말기 마침내 민란이 일어났다. 유바다(劉八帯), 손찬(孫左), 장진성(張錦成), 두건덕(後建德) 등이 잇달아 농민봉기를 령도하였고 농민봉기군의 위력은 급속히 발전하고 더욱 강해졌다.
바이두백과사전-양광(수나라 제2대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