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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두오의 이야기

1930년 가을, 원이두오는 국립 칭다오 대학교에서 문학부 학장 겸 중문학과 학과장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칭다오는 식민지 영향이 심각했던 유명한 해안 도시로 일본인들의 오만과 악행이 극심했습니다. 칭다오 대학의 일부 학생들은 해변에서 일본 로닌에게 이유없이 구타를 당했지만 일본 로닌은 학생들을 경찰서로 보내 구금했습니다. 경찰은 일본인을 비웃으면서 학교 측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을 속였다고 비난했습니다. 원이두오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며 "중국! 중국! 너 죽었어?"라고 외쳤습니다. 교장에게 판단을 구했습니다. 경찰은 원이두오와 학생들의 강력한 항의 끝에 학생들을 석방해야 했습니다.1932년 난징 중앙 정부와 산둥 지역 세력 간의 권력 및 이권 투쟁은 파벌 분쟁과 선동으로 칭다오 대학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원이두오는 많은 공격과 비방에 시달렸고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0년대 쿤밍연합대학의 교수였던 원이두오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지 못했고, 아내는 병이 있었고, 집에 많은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중등학교에서 아마추어 강의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교편을 잡은 지 1년 만에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친구의 아이디어인 인장을 새긴다는 죄목으로 퇴학당했습니다.

그래서 쿤밍의 시장에서 원이두오가 "실행 샘플"을 인쇄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소규모 사업을 하는 지인들은 돈을 거의 벌지 못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원이두오는 노점을 차릴 생각으로 테이블을 준비했습니다.

원이두오의 인쇄 노점은 하루만 문을 열었고, 다시 돌아오라는 설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점 없이 어떻게 한 가족이 살 수 있을까요? 결국 메이이치 총장은 주즈칭, 션콩웬 등 11명의 교수에게 연락해 원이두오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글씨를 새겨달라는 광고를 신문에 냈습니다.

광고에는 "돌도장 한 자에 1200위안, 이도장 한 자에 3000위안, 여백은 한 자로 계산하고 너무 크거나 작으면 두 배로 한다"는 금시 운영 규칙의 조항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쿤밍 사람들은 상아 도장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학교수들의 도움으로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원이두오는 인장에 1,400개 이상의 지문을 남겼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이두오의 손가락에 큰 여드름이 생기고 눈도 흐려졌습니다. 원이두오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저는 수공예가입니다. 힘들어도 조각은 해야죠!"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원이두오(1899년 165438+10월 24일-65438+0946년 7월 15일)는 본명이 원자화(溫家和)로 후베이성 황강시 서수현 출신입니다. 그는 현대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이자 확고한 민주주의 투사였으며 중국민주주의연맹의 초기 멤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