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없었다면 고바야시는 깨달음을 얻은 승려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시기였고, 승려의 자격은 징집 서류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1940년 고바야시 스님은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었습니다. 그는 침략군에 강제 징집되어 산둥성 자오둥 반도에 파견된 일본 북중국 파견 제12군 기관총 사수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듬해 고바야시는 산둥성 무핑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제8로군 병사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 후 그는 8로군이 포로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특히 일본 침략자들의 잔인함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18년 9월 18일 8로군 창설 기념일에 자진 입대했고, 연안에서 공부하며 일본 반전연맹의 지부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적진에서 큰 공을 세우며 항일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른 일본 항일연맹 전사들과 달리 그는 일본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실명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고바야시는 승려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삶과 죽음을 모두 겪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을 포위하는 날이면 항상 전선 앞으로 달려가 메가폰을 들고 자신의 이름과 출신지를 소개하며 건너편 일본군에게 모국어로 외쳤습니다. 이때 그가 전에 배웠던 불교가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고바야시는 특히 상대방의 정신을 감동시키는 데 능했고, 수십 명의 일본 병사들이 고바야시에게 영감을 받아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때문에 고바야시는 침략한 일본군의 주요 사살 대상에 올랐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 후 그는 아름다운 간호원과 결혼하여 1955년 그녀를 일본으로 데려와 중국을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노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