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이 도망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서본원사 시신 서촌 겸 문설에 따르면 산남도주를 핍박하는 이유는 기지 이전 문제라고 한다. 신선팀이 기지를 서본원사로 옮겼기 때문에 대원 증가로 기지가 더 좁고 서본원사의 근왕색이 상당히 짙다. 장주번과의 관계도 상당히 가까워서 토공이 일거에 이 관계를 근절하려고 한다. 그래서 토공은 사측 이전 기지의 요구를 단호히 반대하고 이 행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근왕의 의지가 상당히 강한 산남은 토공 방법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근토와 토공은 이 일에 대해 전혀 교집합이 없다. 산난이 상대의 행동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품게 되면서 산남은 마침내 신선팀을 이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산남은 당초 존왕을 목적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들 근왕지사들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신선조에 의혹을 느끼고 도망가기로 했다.
이후 신선팀을 이탈한 이동과 밀약이 있어 신선팀을 미리 떠났다.
평성 10 년 발견된 랑사문구보국기사 (영창신팔의 수기) 에 따르면 원치원년 (1864 년) 6 월 26 일 산남이 아파서 금문이 발생한 근거지에서 신선그룹 기지로 옮겨져 수비작업을 할 수 없어 금문의 변에 기록되지 못한 사적에 대해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