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커청(1902-1986)은 1902년 10월 1일 후난성 융싱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북벌 원정에 참가했다. 1928년 호남봉기 융싱신년폭동을 주도하고, 주덕(朱德), 진의(陳儀)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景康山)으로 진격했다. 그는 한때 중국 노농적군 사령관, 사단 정치위원, 군사정치부장, 홍군 제3군 정치부장 대리를 역임했다. 항일전쟁 당시에는 팔로군 총정치부 조직부장, 제344여단 정치위원, 제2·4열 정치위원, 제5열 사단장 및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신4군 제3사단 사령관, 정치위원, 장쑤성북구 당위원회 서기.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 동북지방으로 진군하여 서만주군구 건설을 주도하였고, 서만군구 사령관, 공산당 서만지부 부서기, 대리를 역임하였다. 중국 당, 동북민주동맹군 부사령관, 군수사령관, 정치위원, 중국 공산당 허베이-차하르-요 지부 서기, 군구 정치위원, 정치위원. 동북야전군 제2군단. 천진해방 후 천진시당위원회 서기, 중국공산당 군사통제위원회 주임 등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후난성 군사정치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장, 총군수부장, 정치위원,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부 부부장,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제8차 중앙위원회 중앙비서처 서기. 중국 공산당, 산시성 부성장, 중앙군사위원회 고문. 1955년에 장군 계급을 받았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 등과 함께 '반당세력'으로 잘못 분류됐다.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1978년 12월에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1986년 12월 28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