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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고려의 역사.

1. 고구려의 역사

춘추전국시대 한반도에는 제대로 된 정치적 세력이 없었다. 국세(國朝)가 압록강을 지나고, 계자는 주(周)나라의 지방 왕자였다. 한나라에 들어와 후에 한국의 위씨(魏氏)로 대체되었으나 여전히 한나라의 가신이었다. 기원전 108년(원3년) 한나라는 위씨를 멸망시키고 북조선에 낙랑을 비롯한 4개 현을 세웠는데, 중원 이북 지역에서는 중원과 같은 통치가 시행되었다. 한반도.

고구려는 고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다. 한원 건조 2년(기원전 37년) 현도현 고구려현 부위 출신 주몽이 건국했다. 서한(西汉)현(현 요녕성 신빈현). 그 후 화성구시(현 요녕성 환인현 오누산성)에 도읍을 정했다. 서한 원사 3년(서기 3년)에 도읍을 도심으로 옮기고 4년에 위나옌성(현재의 길림성 계안시)을 건설하였다. 북위(North魏) 시광시대(AD 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668년 고구려 정권은 한반도에서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북한 전체와 조선 서부는 당나라에 속해 안동 보호령에 속해 있었다. 이때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묵계족에 속했고, 신라 땅은 조선 동부에만 속했다.

2. 고려

당나라 북동부 지역에서는 신라도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점차 쇠퇴했다. 당말에는 고려, 호백제, 신라 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신라 말기에는 정부부패와 토지합병이 만연했고, 농민봉기가 잇달아 이어졌다. 892년 양기가 주도한 강원도봉기(江원지방봉기)는 대규모였다. 901년 신라왕실에서 태어난 공이(孔伯)가 반란군의 지휘권을 빼앗아 왕이 되었고, 국호를 모환(毛况)으로 삼았으며, 후에 태봉(臺峰)으로 개칭하였다. 918년 공의족은 왕견을 죽이고 스스로 왕을 선포하고 개성(송월)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 왕조(918~1392)를 세웠다. 936년 한반도가 통일되었다.

3. 고구려와 고려의 차이점

918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등장했다. "고려". "왕고려"라고 한다. 왕의 고려는 고구려의 칭호를 이어받았지만 둘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속관계가 없다.

우선, 두 정권은 서로 다른 시기에 수립되었고 서로 다른 역사적 발전 속성을 갖고 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으며, 처음에는 서한시대 현도현 고구려현의 관할하에 있었다. 점차 세력이 강해졌지만 중앙왕조와의 가신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수당시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확장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의 다른 정권이 중원에 조공을 바치는 길을 막았고, 이는 수당을 정복하는 결과를 낳았다. 668년 고구려는 마침내 당나라로 통일되었다. 고구려의 관할권은 처음에는 완전히 당나라 안동보호구역(최초의 행정 중심지는 오늘날의 평양에 있었다)에 속해 있었는데, 그로부터 몇십 년 뒤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또 다른 지방정부인 발해가 관할권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 그 일부는 한반도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남쪽의 신라 정권의 일부는 여전히 안동 보호국의 관할하에 있었다. 고구려인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의해 내륙으로 이주한 후 한족과 합병되었고, 일부는 주변 민족에 통합되어 국가였던 고구려도 멸망하였다. 7세기 동안 중국 역사 발전의 긴 강 속에서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250년이 지난 918년에 왕씨 가문의 고려 국가가 건국되었으며, 935년에 한반도의 또 다른 정권인 신라를 대신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왕국을 형성하여 반도의 중부와 남부를 통일하였습니다. 1392년 왕의 고려 재신 이성귀가 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자리를 잡았으며, 1393년에 명나라에 '조선·합녕외국'이라는 칭호를 청원하고, 명나라가 이성귀를 조선왕으로 하사하였다. 왕의 고려는 그 후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고,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왕조라고 부른다. 이것이 명청시대 우리나라의 한국 모습이다.

둘째, 관할구역 내 주민 구성이 다르다. 고구려 관할지역의 주민은 주로 고구려민족이다. 고구려인의 기원은 고대 우리나라 고대민족인 우지족을 따라 동쪽으로 이주한 부유족, 고의족, 워주족, 소수기족, 동우족 등이다. 사람들과 Xianbei 사람들이 기다립니다. 서로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이 장기적으로 동거하면서 점차 하나로 합쳐졌고, 역사서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불린다. 왕이 고려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은 주로 신라인이다. 왕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한 후, 신라와 백제는 왕고려의 주요 거주민이 되었다. 신라인은 주로 한반도 남부의 진한족과 벤잔족 출신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일부 고구려인들이 합류했지만 이들이 신라인의 주요 원천은 아니다. 백제의 조상은 주로 한반도 남부의 마한족이다.

즉, 왕고려의 주요 거주민은 주로 한반도 남부의 '삼한족'이다. 또한 많은 사료를 보면 왕고려와 고대 중국인들이 왕고려를 '구삼국'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의. 수백년에 걸친 한국 왕씨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이들 구성원은 점차 하나의 씨족으로 합쳐졌는데, 역사서나 학계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한씨라고 부른다. 왕씨의 고려가 이씨의 조선으로 교체된 후 조선도 고려를 대신하여 씨족 명칭이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결국 왕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 아니고, 왕고려 왕실도 고구려의 후손이 아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젠(王建)의 가계에 대해 『고려사』의 저자는 “고려의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왕젠은 서한 낙랑현 한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왕씨 가문은 당시 낙랑현에서 유력한 가문이었고, 가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왕견이 죽기 전에 가르쳤던 『십계』에서는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평민으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동시에 '래산한산천인우'라고 불렀다. 마한, 진한, 벤단이 통일된 대한민국은 '삼한'이 있고, 그 후손 대부분은 '삼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상식적으로 분석해보면, 왕전이 고구려의 후손이라면 통치의 필요성에 의해 분명히 이를 알렸을 것이다. 왕씨 가문이 고구려 후손이 아니라는 점도 반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왕의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한나라 시대에 한반도에서 발생한 마한, 진한, 번한은 신라로 발전했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신라는 왕의 고려로 대체되었고, 마침내 왕의 고려가 교체되었다. 리로 발전 이 정권의 영토는 한반도를 넘어 확장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