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에 맞서 싸우려면 국내 정세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국내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하며, 국내 안전이 외세에 맞서 싸우기 위한 충분조건임을 강조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외세에 맞서 싸울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외세의 침략을 정책의 기본 목표로 삼는다.
'외세에 맞서 싸우려면 먼저 국내 정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9·18사변 이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기본 국가정책이다. 국내에서는 '3대 기둥', 국제적으로는 '4방향 분산' 상황이다. '안보'는 국민당 내 통일과 국민정부의 '중앙 통합'을 포함해 '공산당 탄압'을 비롯해 국력을 강화하고 전쟁 준비태세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려면 내정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당의 내정 처리의 기본 국책이자,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9.18사변 이후 국민당은 '마오쩌둥을 탄압하고 일본에 저항하는 것'을 선택했고, 공산당은 '반장·항일'을 선택했다. 국지적 저항전쟁이 전면적 저항전쟁으로 전환됨에 따라, 양측의 이러한 선택은 점차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 협력과정으로 발전하였다.
추가 정보:
'9·18' 사건 이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장개석은 '권력에 맞서 정의를, 야만에 맞서 평화를 실천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제출하라”는 태도로 국제연맹의 판단을 기다린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약한 중국을 위한 “정의”를 옹호하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심을 정당하게 용인했다. 4개월 동안 동북 3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만리장성 항쟁의 실패 이후 장개석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와 일련의 타협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1935년에 이르러 일본의 군국주의 야심은 급격히 커져갔다. '북중국사변'을 일으켰고, 마침내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장제스 정부의 타협과 양보 정책은 난징 청원, 12월 9일 운동 등 애국 운동을 주도한 대다수의 젊은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다른 국민당 좌파들은 "구원 협회"를 조직했습니다. 장과 양이 중국 공산당과 접촉한 후, 중국 공산당은 장을 지도자로 하고 소련이 무기, 식량, 임금을 제공하는 '서북방위정부'를 공동으로 수립하기로 합의한 후 '시진핑'을 출범시켰다.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