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미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연달아 수립된 이후 한반도는 화약통이 되었다.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50년 6월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남북 간에는 874차례의 소규모 갈등이 있었다. 많은 갈등이 돌이켜보면 '우연'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49년 8월의 몽진포 전투가 그 예 중 하나인데, 이 갈등은 고무보트로 촉발됐다.
1949년 여름, 한국 해군은 해상에서 선박관람식을 집중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8월 10일 저녁 미군 참모총장 로버트의 고무보트가 들이닥쳤다. 대한민국의 그룹이 우연히 사라졌습니다. 사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이 고무보트는 미국 국방부에서 보낸 것인데, 로버트는 이 고무보트를 여러 차례 이용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친선을 표하며 “대통령이 사용하고 싶을 때마다, 즉시 빌려드리겠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이승만 씨는 배 관람식이 끝난 뒤 이 고무보트를 바다로 가져가서 낚시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때 우리 해군은 불안해졌다. 인천경찰청은 군함대를 파견해 연평도와 덕적도, 백령도 해역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로버트는 즉시 이승만에게 알렸다. 왜냐하면 1948년 9월에 우리 해군 함정 4척이 월북했고, 육군 8연대 2개 대대 장교와 병사들도 북한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당시 이영준 육군참모총장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호출받았다. 무슨 일이야? 남조선 육·해군 참모총장들이 김일성을 도우러 여기에 온 걸까? 동중국해에서 태극기를 게양한 배들이 한때 도망쳤는데, 지금은 성조기가 서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바다(황해) 배는 다시 북으로 향하는데... 아직도 이대로 가는 것이 타당한가?” 이승엽의 말은 날카로웠다. 함명수 당시 해군정보사령부는 청와대에서 나온 뒤 손원일에게 이 문제는 북한과 관련된 일이고 보복작전을 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한국에서 직접 운영을 지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체면을 살리기 위해 손원이는 별 생각 없이 동의했다.
이때 대한민국 해군 서해정보군사령관 이태영 소령은 정찰을 통해 고무보트가 북한 몽진포항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최선의 방법을 제안했다. 고무보트 탈환은 밤에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Sun Yuan은 즉시 Xian Mingzhu에게 전투 계획을 작성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전투계획에 따르면 함명수는 특수요원 20명을 포함한 특수작전부대를 직접 지휘하고, 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인천경찰청 1함대 함정 6척을 투입하게 된다.
1949년 8월 16일 이른 아침, 충무공함과 통영함, 그리고 20여명의 특수요원으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인천항을 떠났다. 우리 해군은 북한 해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백령도 남쪽과 몽진포 서쪽을 일주해 17일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날 오전 5시쯤 우리 해군 요원들이 고무보트 5척을 타고 몽진포항으로 돌진했다. 북한 해군 해안 초소 소속 경계병들이 이를 발견하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한국 요원들이 고무보트에서 총격을 가했다. 이때 고속고무보트 5척 중 갑작스러운 엔진 고장으로 4척이 해상에 머물렀고, 1척만이 계속해서 해안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 해군 지원군이 도착해 해상에서 박격포 사격을 시작했고, 정박 중이던 우리 해군 고무보트 4척이 산산 조각나고, 고무보트에 타고 있던 요원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바다로. 실제로 거의 정박할 뻔한 고무보트는 외로운 상황이었다. 배에 탄 함명수는 팀원들에게 전진하라고 목청껏 소리치며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전투 지휘에 집중하던 중 다리에 총을 맞고 부상을 입어 배에 떨어졌다. 이때 참전하러 온 우리 해군 JMS-302 통영함 공중식 대령이 고무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올라와 중기관총으로 북한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의 휘하의 통영함도 해안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함명수의 강력한 화력을 이용해 북한 해군의 해안 사격을 제압하며 점차 함명수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나머지 5척의 배들도 감동을 받은 듯 빠르게 몽진포항 앞바다로 가까워졌다.
이때 북한 해군 경비정 여러 척도 돌아왔고, 양측은 해상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국 해군 함정의 엄청난 화력 우위로 인해 북한 해군은 치열한 전투에서 경비정 4척이 피격되어 침몰하고 장교와 병사 5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해안 전초 기지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공정지는 부하들에게 해안 정찰을 지시할 기회를 잡았으나 고무보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병력을 동원한 우리 해군에 큰 실망을 안겼다. 그러나 공정지 등은 자신들이 북한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 돌아갔다.
공정지 일행은 육지로 돌아온 뒤 최선을 다해 수군 최고 간부들에게 전투 결과를 자랑했다. 그래서 고무보트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이승만은 장교들을 칭찬했다. 그리고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 한국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1950년 1월 마침내 고무보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은 대한민국 해군 인천수비대 소속 안성자 상병이 한 일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팀을 떠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고무보트를 몰고 북한으로 갔다. 1950년 봄 고무보트를 타고 귀국한 뒤 몰래 서울에 숨어 있다가 체포돼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해군 특수요원.
한국인의 눈에 몽진포 전투는 한국 역사상 북한에 대한 성공적인 보복 작전으로 특수 요원을 포함하여 전투에 참여한 20여 명의 해군 장교와 군인 중 한 명뿐이었습니다. ,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6·25전쟁' 직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촉발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정부가 큰 혼란을 일으켰다며 이승만에게 직접 경고하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