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과학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다양한 기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실험을 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르네상스 조각 예술의 최고봉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475년 3월 6일 플로렌스 근처 카플스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케치와 카플스의 시장이었습니다. 13세에 그는 피렌체 화가 기를란다요(Ghirlandaio)의 화실에 들어갔고, 이후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메디치 아카데미의 견습생으로 전학했습니다. 1496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와서 그의 첫 대표작인 '바쿠스'와 '그리스도의 애도'를 창작했다. 1501년에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4년에 걸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비드〉를 완성했습니다. 1505년 로마에서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교황 영묘 건설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았고, 1506년 공사가 중단되자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8년에 그는 로마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4년 5개월 동안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1513년 교황 영묘 건설이 재개되었고, 미켈란젤로는 유명한 '모세', '속박된 노예', '죽어가는 노예'를 창조했습니다. 1519년부터 1534년까지 그는 피렌체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인 산 로렌조 교회의 메디치 영묘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1536년 미켈란젤로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으로 돌아와서 거의 6년에 걸쳐 교회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그 후 그는 1564년 2월 18일 그의 작업실에서 사망할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조각, 건축 및 소량의 회화에 종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유럽 르네상스 조각 예술의 최고봉을 대표하며 그가 창조한 인물은 웅장하고 강력하며 무한한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사실주의에 기초한 비범한 이상적 처리를 보여주며 전체 시대의 전형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창작에는 인본주의적 사상과 종교개혁운동의 영향이 컸다. 그는 당시 민간계급의 애국심과 자유를 위한 투쟁정신을 사실주의적 기법과 낭만적 환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적 정신, 철학적 사고와는 달리 그의 비극적 열정을 예술 작품에 쏟아부었다. 이 비극은 장엄한 형태로 표현되며, 그가 창조한 영웅은 이상의 상징이자 현실의 반영이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예술적 창작을 서양 미술사에서 극복할 수 없는 정점으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