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교 경전 저서' 예기' 에서 인간성에 대해 이런 통찰력이 있었다.' 음식 남녀, 사람의 큰 욕구' 가 있었다.
이 말은 식욕과 남녀의 일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뜻이다.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현대사회의 물욕이 횡포하는 상황에서 각종 욕망이 속출하고, 음식 남녀의 욕망은 이미 억압되어 약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인의 지혜론은 오늘날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해석에 적용된다.
특히 남녀 간의 관계는 겉으로는 밋밋해 보이지만 내면은 더욱 거세지고 복잡하다.
남자와 여자는 세상에서 신기하고 관계가 미묘한 종이다. 여자가 있는 곳에는 남자가 더 남자처럼 되고, 남자가 있는 곳에는 여자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된다.
남녀가 혼자 있는 방이 당혹스러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녀가 외딴 섬에서 어떤 기이한 이야기가 벌어질지는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다.
18 세기 말부터 19 세기 초까지, 9 명의 영국 탈영병과 남태평양 원주민 남성과 원주민 여성이 피트케인 섬에서 일어난 전설적인 경험은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야유였다.
산업혁명의 출현으로 영국은 현대화된 급행열차를 탔고, 경제사회가 나날이 번영할 뿐만 아니라 선진 항해 기술에 의존하는 해외 활동도 더욱 흥성했다.
1789 년에 본티라는 영국 왕립 해군 전함이 남태평양 해역을 운항했는데, 선상 인원으로는 선장 윌리엄, 대부장 크리스틴, 수십 명의 선원이 있었다.
전함은 먼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서 출발하여 천신만고 끝에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 남부로 왔다.
바오밥나무의 씨앗과 식물을 찾아 서인도 제도로 운반해 바오밥나무가 자라서 맺는 열매를 섬에 흑노의 식량으로 삼는 것이 목적이다.
기나긴 해상 항해는 무미건조하고 고달프다. 필요한 음식과 담수 보급이 부족해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곰팡이가 난 빵과 악취가 나는 물을 먹고 살아야 했다.
생활의 고달픔은 선원들을 괴롭혔지만, 심술 궂은 윌리엄 선장은 종종 선원들에게 거칠고 비타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인생명언)
전함이 태풍으로 타히티에 체류했을 때, 마침내 참을 수 없는 대부장 크리스틴은 그를 지지하는 선원들을 이끌고 윌리엄 선장을 전복시키는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영국 법에 의한 반군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했고, 정부에 의해 체포된 것은 막다른 길밖에 없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귀국하면 필연코 죽고, 바다에서 망명하는 것은 생존 조건이 열악하더라도 한 가닥의 생기가 있다.
그래서 크리스틴과 다른 탈북한 선원들은 바다에서 표류하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안식처를 찾기 위해 크리스틴은 그를 따르는 선원 8 명과 타히티에서 온 원주민 18 명, 원주민 여성 12 명과 원주민 남자 6 명을 포함해 타히티에서 다른 섬으로 탐험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밤낮없이 노력과 힘든 트레킹 끝에 그들은 결국 황량한 핏케언 섬에 정착했다.
핏케인 섬은 핏케언 제도를 구성하는 네 개의 섬 중 하나로 면적이 2 위다.
지금은 이미 남태평양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였지만 당시에는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섬이었다.
이렇게 영국 병사 9 명과 원주민 18 명이 핏케언 섬에서 자력갱생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이상은 풍만하고 현실은 뼈다귀이다.
섬은 비록 환경이 조용하고, 마치 세외도원처럼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안전하지만, 섬의 자원은 상당히 부족하다.
의복이 부족하고 풍식이 노숙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개간하여 섬에 심은 바오밥 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생존을 위해 노력하면서 하늘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처음 며칠 동안 생활은 그런대로 평온하고 평온한 편이다.
그러나 곧 선원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 드러났다.
식량 부족과 미래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난폭해졌다.
한 차례의 분쟁에서 크리스틴과 선원 4 명이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로 섬은 점점 인심이 흉흉해졌고, 연일 쌓인 답답함과 원한이 일촉즉발인 것 같다.
원래는 남자 간의 전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들도 참여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주민 여성이 더 친밀한 원주민 남자 옆에 서 있지 않고, 원주민 남자들이 영국 선원을 소멸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영국 선원과 연합하여 원주민 남자를 몰살했다는 점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마지막 원주민 남자가 벼랑에서 뛰어내릴 때까지, 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 내전은 6 명의 원주민 남자로 모두 사망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윈스턴,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이때 섬 주민은 영국 남자 4 명과 원주민 여자 10 명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의 내일이고, 남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자의 오늘이라는 말이 있다.
영국 선원들은 결국 대영제국 출신으로 식견이 넓어 말투나 개성수양에 있어서는 황토를 등지고 있는 원주민 남자와 비교할 수 없다.
영리하고 유능한 영국 남자에게 의지하여 불모지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원주민 여성이 영국 남자를 돕기로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연합 원주민 여성이 원주민 남자를 깨끗하게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영국 선원들 사이에 또 내란이 일어났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윈스턴,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원주민, 남녀명언)
1799 년, 탈북 선원이 피트케인 섬에 유배된 지 10 년째 되는 해에, 섬의 성인 남자는 존밖에 남지 않았습니까? 아담스와 양 두 사람.
나중에 양도 천식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담스는 10 명의 여성과 몇 년 동안 혼혈아를 낳은 유일한 성인 남자가 되었다.
1814 년에 영국 왕립 해군은 피트케인 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뒤척이며 법에 대한 존중과 인간성에 대한 배려로 의연하게 원항하여 아담스를 체포했다.
세심한 심문을 거친 후 여론이 아담스에게 관대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영국 정부는 곧 아담스를 석방하고 그의 범죄를 사면했다.
자유를 되찾은 아담스는 1829 년에 사망할 때까지 핏케언 섬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피트케인 섬은 명목상 영국의 해외 영토가 되었다.
핏케언 섬의 마지막 순수 영국계 남자로 아담스를 기념하기 위해 핏케언 섬의 수도는 아담스타운이라고 불린다.
그때부터 영국 선원과 원주민 여성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96 년 섬에서 발생한 의외의 사건으로 섬이 다시 한 번 여론의 풍파에 빠졌다.
한 목사가 영국 정부에 작은 섬 시장 스티브의 아들이 열한 살 된 딸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일련의 조사를 거쳐 사람들은 마침내 평화 뒤에 숨어 있는 죄악 풍습을 발견하였다.
원래 섬에는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녀가 관계를 갖는 전통이 전해지고 있는데, 섬 주민들의 수가 적고 조상과 거의 동족하기 때문에 혈연 관계가 있는 친족까지 포함돼 있다.
죄가 밝혀지자 영국 경찰은 섬에서 살던 수십 명의 여성을 찾아 사실대로 고발하고 법정에 나가 증언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 영국 경찰은 성폭행 혐의를 받은 남성 섬 주민 30 여 명을 소환했다.
이 시점에서 핏케인 섬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더욱 신비롭고 명성이 자자하여 소설로 여러 차례 쓰여지고 영화로 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정부는 피트케인 섬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교육의 시행과 문화의 침투로 사람들의 각오와 행동이 눈에 띄게 교화되고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