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억하고 국가적 굴욕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는 '9·18' 사건이 일어난 지 83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 아픔은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역사를 기억하라라고 늘 경고한다. , 국가적 굴욕을 잊지 마십시오. 국가적 굴욕을 잊지 말아야 우리는 그 부끄러움을 깨닫고 용감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축적된 에너지가 계속해서 터질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는 '슬픔' 속에서 일어서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
83년 전 오늘, 일본 관동군은 뻔뻔하게 '9·18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부를 무력으로 공격해 중국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무력침략의 '서곡'을 열었고 고통을 안겼다. 왕따를 당하는 중화민족은 국가 예속과 대량 학살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부끄러운' 역사, '쓰라린' 피눈물, 현대사의 '슬픈' 페이지는 모두 13억 중국인에게 영원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
추가 정보:
'9.18 사건'의 역사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 18일 저녁, 1931년, 일본 관동군 후시대독립근위대 제2대대
제3중대는 원래 주둔하던 후시대 병영을 떠나 남만주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밤 22시 20분쯤, 일본 관동군 철도수비대 유조호 분견대 대장 가와모토 수오마루 중위가 이끄는 소규모 분견대는 철도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펑천(현 선양)에서 북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북대영에서 800m 떨어진 유조호남-만주 철도 구간에서 소형 폭발물이 터져 철도 일부가 파괴됐다.
그리고 동북군 병사를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배치했다. 철도파괴의 증거는 중국군이 철도를 파괴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거짓 주장을 한 사건이다. 당시 중국 동북부 지역을 만주라 불렀기 때문에 일본은 이 사건을 '만주사변'이라고 불렀다. ?
폭발과 동시에 철도 폭발 지점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원관툰에 머물고 있던 가와시마 대위는 병력을 남쪽으로 이끌고 폭발 후 일본군 북대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 북대영과 선양시에 주둔한 군인들은 남북의 두 길로 나누어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을 공격했다.
군대는 패했다
사건이 발생한 1931년 9월 18일 밤, 총사령관실 참모장 융전 중장이 동북 변경군은 장학량의 명령에 따라 동북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움직이지 말고 총을 창고에 넣고 버티고 죽어라. 모두 나라를 위해 자비를 베풀고 희생하자."
이튿날인 1931년 9월 19일, 장학량은 연합병원에서 천진대공보 기자와 다시 통화해 “나는 이미 우리 병사들에게 일본군을 도발하면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북경 대학 캠프의 우리 군대는 조기에 무기를 수집하여 창고에 보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장학량의 무저항 명령이 시행된 결과, 베이다 진영의 수비군 8,000명이 일본군 약 300명에게 패배했다. ?
일본 독립수비대가 북진을 공격하는 동안 관동군 제2사단 제3여단 제29연대는 9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봉천성을 잇달아 점령했다. 봉천, 사평, 남만철도와 안풍성철도를 따라 잉커우, 봉황성, 안동 등 18개 마을이 있다. 창춘 지역의 동북군은 즉각 반격을 가했고, 다음날 창춘은 함락되었다.
1931년 9월 21일, 일본 제2사단 주력군이 길림성을 점령했다. 1931년 10월 1일, 동북군 흑룡강성 도남 수비대 사절 장하이펑이 적에게 항복하고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3개 연대를 보내 치치하얼을 공격했다.
1931년 10월 26일, 관동군 제2사단 제29연대는 쓰타오 철도 연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1931년 11월 4일, 관동군 넌장 분견대가 넌장교 북쪽 수비군을 공격했다. 1931년 11월 19일, 일본군은 치치하얼을 점령했습니다. ?
금주 대피
장설량은 사건 발생 후 봉천을 떠나 부하들을 이끌고 금주로 이주했다. 1931년 10월 8일 관동군은 폭격기 12대를 보내 금주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 미나미지로 전쟁장관은 여전히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에게 “중국군의 대공포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자위조치를 취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도. 관동군은 성명을 내고 "장설량은 금주에 집결했다. 많은 병력을 방치하면 일본의 권익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 만주와 몽골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관동군이 금주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그 후 시원이 주창한 국제조화외교정책은 심각한 차질을 겪었고, 일본은 점점 더 강경해졌다.?
흑성 함락 이후 난징 정부는 일본군이 침략할 것임을 깨달았다. 금주는 1931년 11월 25일 국제연맹 대표 시자오지(Shi Zhaoji) 중국대사관에 급히 명령하여 금주를 중립지대로 지정할 것을 국제연맹에 제안했고, 12월 2일 국민당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의 장관들에게 통보했다. , 그리고 미국은 금주를 중립지로 지정하기로 합의했다. 군대는 금주와 산하이관에서 철수했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이 프랑스, 영국, 미국을 만족시키는 보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3국이 중립지대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징 정부의 성명에 대해 장학량은 이 문제에 대해 베이징 주재 일본 대사관 참사관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
그러나 이런 협상은 난징 측에서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도 타협 조건을 얻지 못했다. 금주 무력화 이후 일본은 동북군 전체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폭로되자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학생들이 이에 반대했습니다. 1931년 12월 4일, 국민정부 외무부는 강제로 Shi Zhaoji에게 무력화 사건이 포기되었음을 선언하는 긴급 전보를 보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일본군이 금주를 공격하면 중국은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도 이에 대해 “일본군이 공격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항할지 여부에 대한 문제는 난징 정부와 장설량 사이에 있다.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장설량은 분명히 평화적 해결을 선호했고 '진저우 중립화' 계획을 선호했다. 1931년 11월 29일 , 장학량은 장제스에게 "나는 (중립화 사건을 언급하며) 이 일에 개인적으로 찬성한다"는 비밀 서신을 보냈다. 이 움직임은 난징 정부에 심각한 불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구웨이쥔은 1931년 12월 3일 전보에서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후 1931년 12월 5일 고웨이군과 송자문은 장학량에게 공동으로 전갈을 보냈다: "형제님, 이제 일본군이 금주로 진군하고 있으니, 형제님. 개인적인 계획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어려움을 없애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개석도 1931년 12월 8일 장설량에게 전화를 걸어 “금주군은 이때 후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장학량은 12월 21일 제2군사령부에 전화해 “일본이 최근 금주를 공격했을 때 관문 밖에 주둔한 우리 군대가 경계해야 하지만 현 정부 정책이 시기적절하지 않으면 당연히 금주군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군은 건안, 융핑, 루안허, 창리 등에 주둔하고 있다."
1931년 12월 25일과 26일 장설량은 국군에 전화를 걸었다. 정부는 또 “진전쟁이 시작되면 중국 화북의 전반적인 정세가 동시에 우리 영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평진과 천진을 어지럽혀 머리와 꼬리를 관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금주는 방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북부의 영토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장학량은 조언을 무시하고 철수를 고집했습니다.
전쟁이 확산됨
동시에 1931년 12월 15일 관동군이 12월 7일 일본군 중부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제8여단은 추가 병력을 파견했고, 제20사단 사령부, 혼성 제38여단, 중폭격대대를 북한에서 투입해 관동군을 보강했다. 12월 28일 제2사단 주력이 요강을 도하했다. 12월 30일에 제38여단이 금주를 공격하기 위해 제39여단이 대호산(현재의 대호산)을 공격했을 때?
일본군이 금주를 공격하자 국민정부는 장설량에게 거듭 명령을 내렸다. 1931년 12월 25일, 그는 "자위를 위한 적극적 계획"을 명령받았지만, 장쉐량의 군대가 금주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후, 국민당 정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2월 30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는 긴급 전보가 보내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1932년 1월 3일 제20사단 사령부는 훈성 제38여단을 이끌고 금주를 점령했다. 금주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 제12여단과 제20여단은 이미 장설량의 명령에 따라 뤼안동과 러허 지역으로 후퇴했고, 일본군은 장설량의 거듭된 거부로 전투 없이 금주를 점령했다. /p>
1932년 1월 28일 관동군 제3여단이 장춘에서 하얼빈으로 진군하는 것과 동시에 제2사단도 증원을 위해 요녕성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에 국제사회가 주목했다. 만주와 일본이 국제도시 상하이에 소란을 일으키며 1.28사변을 촉발시켰다.
1932년 1월 31일, 이란 수비대 사절이자 제24여단 사령관 리두(Li Du)가 길림 자위대를 이끌고 하얼빈을 방어했다.
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자위대는 투구와 갑옷을 버리고 패하고 빈현으로 후퇴했다. 1932년 2월 5일 일본군이 하얼빈을 점령했다. ?
전쟁의 결과
장설량은 '무저항 정책'을 거듭 주장했기 때문에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삼국 땅 100만 평방킬로미터를 차지했다. 일본군이 동북3성을 점령하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전국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대규모 반일구국운동이 급속히 일어났다.
인민일보 - 역사를 기억하고 민족적 굴욕을 잊지 않으며 '슬픔' 속에서 일어서기 위해 분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