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는 제2차 항미원조전투 중 창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군 3군이 어렵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무기와 장비를 보유한 미 육군 제10군과 맞서 싸웠다. 1950년 11월 27일, 북한 창진호 일대에서 9월 1일부터 12월 24일까지 직접 전투가 벌어져 항미전쟁에서 미군 연대 전체를 전멸시키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을 지원하여 미군 에이스 부대가 역사상 "최장 후퇴"를 겪도록 강요합니다.
이 전투에서 38도선 이북 동쪽의 광활한 지역이 회복됐다. 의병군의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동시 승리는 전세를 일제히 역전시켜 6·25전쟁의 전환점이 되었고, 최종적인 휴전협상에서도 승리의 초석을 마련했다.
장진호 전투 사상자 수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4일까지 중국과 미국의 두 에이스 군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의 호수 지역. 미군은 해병 1사단(해병 1사단으로 통칭)과 3사단, 7사단을 비롯해 한국군 1군단을 포함해 약 10만명 규모의 공격자는 의용군 9군단이다. 20군으로 구성, 26군, 27군으로 구성, 약 15만명.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서 20일간의 고군분투 끝에 미군 잔병들은 항공모함 7척의 엄호 아래 해로를 이용해 전장에서 탈출했다. 이는 또한 모든 "유엔군"이 북한에서 추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남해안에서 긴급 진입하고 방한복을 갖추지 못한 등으로 인해 의용군 9군단은 이번 전투에서 사상자 19,202명, 동상 28,954명, 동상 4,000여 명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얼어 죽었습니다. 당시 27군 대대교관이었던 지호천(1988년 장군 진급)에 따르면 그는 대대에서 동상을 입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미 육군 제1해병사단도 동상을 입어 7000여 명이 동상에 걸렸고 수백 명이 얼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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